[자서전] 디자인과 프로그래밍도 구분 못하던 청년

[자서전] 디자인과 프로그래밍도 구분 못하던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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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정말 많은 알바를 했다. 부모님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아르바이트하는 걸 반대하셨다. 그래서인지 처음 해보는 알바는 흥미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가장 크게 느낀 건 따로 있었다. 결국 나에게는 안정된 직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디자인과 개발 사이에서
사진: Pexels / Negative Space

말년 휴가를 나오자마자 압구정 로드숍에서

그동안 쓸 생활비를 모으려고, 나는 말년 휴가를 나가자마자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압구정 로데오의 한 로드숍에서 옷을 파는 판매직이었다. 군대에서 만난 똑똑한 후임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컴퓨터 관련 국비지원을 틈틈이 알아보면서 알바도 성실하게 했다.

돌아보면 시기마다 아르바이트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조금씩 달랐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가 목적이었다면, 전역한 뒤에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공부가 목적이 되어 있었다.

뭔가를 만드는 일이 멋져 보였다

그때 다니던 로드숍은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옷을 파는, 어느 대기업의 자회사 중 하나였다. 마침 쇼핑몰 쪽에서 근무하시는 분들과 회식을 자주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러다 한 웹디자이너 형님과 형 동생 하면서 가까워졌는데, 그분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를 만드는 일이 참 멋지다고 느꼈다. 그 영향으로 나도 웹디자인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학원 하나를 못 정해 시간만 흘려보내다

압구정 로드숍에서 6개월쯤 일하면서, 공부할 학원을 정말 많이 찾아다녔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나에게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막막했다. 그래서 더 오래 걸렸다. 사실 웹디자인 국비지원 학원은 정말 많았는데, 그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그동안 술도 마시고 놀기도 했다. 씀씀이가 커지다 보니 결국 모아두려던 목표 생활비를 다 써버렸다. 어쩔 수 없이 로드숍 알바를 그만둔 뒤에도 2개월 정도 현금수송회사에서 일을 더 했다. 하지만 그 일이 너무 힘들어서, 목표 금액을 다 채우지 못한 채 그만두고 나와 버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100% 국비지원이 되는 학원이 많았고 생각보다 교육비와 생활비가 크게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나는 무료로 학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국가에서 한 달에 10만 원가량 용돈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출석률이 좋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성실한 한국인에게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실력이 늘기 시작했다

처음 학원에 갔을 때는 어색해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새로운 사람들도 낯설고, 컴퓨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못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만 계속 들었다.

그런데 1주일, 2주일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실력이 늘어갔다. 그게 나에게 굉장한 열정을 가져다주었다. 강사도 내 실력이 부쩍 늘었다고 칭찬해 줬고, 같이 수업 듣는 학생들도 내 실력을 칭찬해 줬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과 동등한 실력을 갖추고, 어떤 부분은 그들보다 더 잘한다는 사실이 내 자존감을 끌어올려 줬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숙제를 다 끝내고 나서도 더 알고 싶은 게 자꾸 생겼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가리지 않고 집에서 혼자 공부했다.

디자인만으로는 웹사이트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런데 학원에서 배운 건, 디자인 공부에 필요한 툴인 포토샵이 주였고 거기에 HTML이나 CSS처럼 웹사이트의 틀만 잡을 수 있는 것들 정도였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디자인만으로는 웹사이트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실제로 사이트가 동작하게 만드는 건 웹 프로그래밍이었다.

그래도 이왕 배운 거, 취직이라도 하려고 웹디자이너 채용 공고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프로그래밍이든 디자인이든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멋있는 직장에 다닐 수만 있다면, 그게 뭐든 다 좋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디자인과 프로그래밍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던 그 시절의 나는 참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도 그 막막함 속에서 일단 알바를 하고, 사람을 만나고, 학원 문을 두드린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는 방향을 손에 쥐게 됐다. 무엇이 될지도 모르고 그저 멋있어 보이는 쪽으로 발을 내딛던 그 어설픈 청년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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